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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야기 화장실문화

작성일 18-05-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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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장실119 조회 17,38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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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의역사 - 한국화장실의역사 - 에티켓

* 화장실의 역사


화장실 용어의 유래 


18-19세기 경 영국에서는 가루를 가발에 뿌리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때 상류층 가정의 침실에는 대개 "파우더 클라짓(powder closet)"이 마련됐다. 이곳은 가발에 가루를 뿌리기 위한 공간으로, 직역하면 "화장하는 방"인데 가루를 뿌린 뒤 손을 씻어야 하므로 물을 비치 하게 됐고 이후 "화장실"이 변소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화장실 고고학 1.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집트인들은 집에서 대변을 보고 집밖에서 식사를 한다”고 적었다. 실제로 아케나턴이라는 3,000여년 전 도시유적에서는 화장실과 항아리 변기가 발견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요강을 발명했다. 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는 것, 얼마나 거추장스런 일인가.

“문명은 화장실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비교문화 연구가 줄리 호란의 말처럼 서구에서는 화장실’이 고고학자들의 체크 리스트에 당당히 올라간다. 이른바 ‘화장실(Toilet) 고고학’이다. 화장실은 인류문화사의 한 단면이 가장 흥미로운 형태로 포착된다.

화장실 유적을 찾아내 인분이나 기생충을 연구하면 특정시대 사람들의 식생활과 질병관계 등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11세기 수세식 화장실이 보고되는가 하면, 변기로 활용된 항아리, 나무통 등이 발견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고대인의 화장실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화장실 고고학 2 


인류학에서는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0만년 전의 "네안데프탈 인(Neanderthal-人)"부터라고 본다. 4만년 전에 시작된 최후의 빙하기(氷河期)는 약1만년 전에 끝났는데 이때 현재의 인류와 거의 흡사한 "호모 사피언스(Home sapience)"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구한 과거의 원인(原人)들도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를 먹고 마시고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 것은 겨우 수 천 년밖에 안 된 과거에 불과하니 이들의 식생활과 배설에 관한 사실들을 자세히 알 길은 없다.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주류 기후가 좋은 하천 유역으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나일 강, 인더스 강 그리고 황화 유역 등이었다. 이들 4대 문명 발상지에서 고대의 조상들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먹고 마시며 산이나 강이나 바다에서 마음대로 배설 행위를 하면서 살았다. 


⊙ 고대 변기의 유물 


인간의 배설 행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나 유물은 이미 기원전 3,000년대부터 1,400년대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실은 인도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의 수세식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물이 흘러 가도록 시설하여 그 위에 배설하게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것과 그 원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있던 바빌로니아의 유적지인 고도(古都) 우르 지방에서도 기원전 2,200년의 수세의자식 변기가 발굴되었다. 하수관을 통해 분뇨를 수세용수(水洗用水)와 함께 건조한 모래땅으로 스며들게 하는 방법을 써서 강이나 바다를 오염시키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크레타 섬의 크넷소스 궁전-지중해 미노아 문화의 중심지-에도 기원전 1,700년에 이미 도기(陶器)로 된 변을 받는 접시형 틀과 나무로 만든 변좌가 갖춰진 수세식 변기가 발굴되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분뇨에 관한 문자의 기원 


고대중국 


중국 한자의 기원쯤 되는 원시 문자에 갑골문자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자라의 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돌로 만들 칼을 이용하여 사물의 모양을 본딴 문자를 새긴 것을 말한다. 중국의 고대 국가인 은나라의 각지에서 발굴된 이 수만 편의 갑골문은 현재 약3천 자가 해독되었는데 현대의 한자와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중 인간의 배설물에 관한 분뇨의 글자는 갑골문에서는 사람[人]자에 소변을 하는 모양을 그린 것이 [尿]자로 나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먹은 쌀이 변(異)해서 배설되었다는 뜻으로 [尿]자는 [糞]자로 변천되었다.

따라서 이 [糞]자는 미곡(米穀) 즉, 곡식과 관계가 있으며 인류가 정착을 하고 농경 생활을 시작하던 시대 때 이미 사람들이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스카라베 


고대 이집트의 상징문자에 "스카라베"라는 것이 있다. 스카라베는 사막에 살면서 그 사막을 지니는 낙타나 사람의 똥을 먹고 사는 곤충을 말한다. 이 곤충은 사람이나 낙타의 똥이 떨어지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그것을 사막의 모래 위에 열심히 굴려 공 모양의 덩어리를 만들고 사막의 어느 구석에서나 그것을 먹고, 그 속에 알을 낳으며 살아간다. 고대이집트인들은 재미있게도 이 곤충을 "태양의 사자" 또는 "신성한 곤충"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스타라베가 분(糞)을 굴리고 다니며 태양과 비슷한 구체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이 스카라베 모양을 고대 왕의 묘나 비석에 새겨 넣었다. 오늘날까지도 이집트 여자들은 반지나 브로치에 이 문양을 새겨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 고대의 분뇨 처리 


수렵을 하던 시대, 인간의 배설 행위는 장소와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넓은 대지에서 바람에 실려오는 풀내를 맡으며 방분(放糞), 방뇨(放尿)의 짜릿한 희열을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간의 배설물은 땅에 스며들거나 비에 씻겨 흐르거나 태양열에 의하여 증발되었다. 어떤 때는 야생 동물이나 가축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경, 목축의 시대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고 주거가 고정되면서 집단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자연히 배설물도 늘어나게 되어 자연의 처리에만 맡길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은 배설물을 건조시켜 연료로 사용하거나 밭에 묻어 거름으로 썼다. 해변이나 강병에서는 배설물을 물에 씻어 보냈으며 목축민들은 가축에게 처리를 맡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람들은 지상의 주거 또는 나무 위에 이러한 배설물의 처리를 위한 장소 설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농경 생활과 분뇨의 이용 


수렵이나 어로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이행해 가던 무렵 사람들은 원래는 비옥했던 토지가 연작을 해감에 따라 지력의 감소로 농작물의 수확이 적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분뇨를 농경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강물에 흘려보내거다 땅에 묻어 그냥 버리던 더러운 분뇨를 논, 밭에 비료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분양법은 중국에서는 이미 은나라 시대에 실시되었다. 은나라 시대의 문자인 갑골문 중에 "분서군전(糞西軍田)"이라는 지방의 밭에 똥을 뿌렸다는 뜻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이미 분뇨를 농사에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도의 화루라파트의 주민들은 옥수수와 감자 재배에 분뇨를 사용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세 배 이상되는 수확을 올렸다. 17세기 페르시아에서는 가축의 대소변을 농작에 이용했다. 멕시코와 페루에서는 비료로 사용되는 대소변을 일컬어 "옥수수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들은 사람의 배설물을 비료로 대지에 환원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며,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유목민들도 밭에 가축의 분을 뿌리는 것이 그러지 않는 것보다 농사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분뇨만은 아주 더러운 것으로 여겨서 농사에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인분을 농사에 이용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것이 단지 더럽거나,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두 문화권 주변의 나일강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정기적인 범람 때문에 언제나 비옥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제국 


로마제국은 잘 정리된 상.하수도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시민들은 현대인들처럼 분뇨를 하수도에 버렸다. 따라서 당시 고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분뇨를 하수도에 흘려 보냈다. 지금와서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아주 발전된 분뇨 처리 방법인 것 같지만, 결국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그 후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분뇨를 물에 씻어 보내는 방법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1804~1885)는 "로마에 하수도가 생기면서 전원을 병들고 피폐해졌다. 그 결과 로마는 이태리의 하수도 속에 침천했다"고 말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멀리 떨어진 상수원-샘이나 계곡물-에 13개의 상수도를 설치했다. 이 수도의 깨끗한 물은 공공의 급수장은 물론 11개소의 공중 목욕장, 1,300개소 이상의 공공 분수대와 150개소의 수세식 공중 변소에 이용되었다. 로마 시대의 변소는 요즘 같은 인공 수세식이 아니고 자연 수세식이었다. 즉 변기의 아래에 항상 물이 흐르도록 하여 오물을 씻어 내리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흘러 나오는 오수는 대하수도로 흘러들게 되어 있었다. 공중 변소는 칸막이가 없고 여러 개의 변좌가 이어져 있어 사람들은 그 곳에 느긋하게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제국 로마의 자연은 점차 그들의 오물로 황폐해지고 있었다. 



동양의 정전법 


농업용 비료에는 분뇨 이외에도 풀을 썩힌 초비, 나무나 풀을 태워 재로 만든 회비, 풀을 베어다 덮는 녹비, 분뇨를 짚 또는 풀과 모래를 섞어 발효시킨 퇴비등이 있다.

옛날에는 인구에 비해 유휴 농경지가 많았으므로 동양에서는 소위 정전법이라는 것이 실시되었다. 정전법이란 밭을 [田]자 모양으로 4등분하거나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해마다 그 구역을 차례로 돌아가며 곡식을 재배하는 방법을 말한다. 따라서 전법(田法)이라면 4년에 한 번씩, 정법(井法)이라면 9년에 한 번씩 윤작하는 셈이 된다. 이는 연작으로 인한 지력의 감소를 방지하고자 하는 방법이었다.

사람이나 가축의 분(糞)을 농경에 이용한 것은 벌써 그 이전의 일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정전법은 사람이나 가축의 분을 밭에 뿌리는 이전의 방법이 연작으로 인한 지력의 감소를 막는 데 만족할 만한 방법이 되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중국의 은나라 시대부터 실시되어 온 것으로 여겨지는 정전법은 그 후 기자조선을 통해 한반도에 전해졌다고 하며, 한국의 경주에는 정전의 유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기자 동래설을 부인하는 사학자들은 이를 진한의 유제라고 하여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 분석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자에 의해 알 수 있는 과거의 사실들은 시간적으로 보아 인류 역사 전체에 있어 2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인류사 속에서 문자가 발명된 이후 줄곧 쓰여진 수많은 사서들 중 그 어떤 것도 인류의 상고사를 연구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태고의 비밀을 가르쳐 주는 거의 유일한 단서는 화석뿐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지구의 주인은 공룡이라는 거대한 파충류의 무리였으며, 지각의 변화는 어떠했고, 인류가 어떤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문화를 발전시켜 왔는지 등에 대한 사실을 상식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연발생적 타임캡슐이라고 불리우는 화석의 공로 였다.

지구상의 모든 과거는 화석이 될 수 있다. 화석이 되지 않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벌레와 꽃, 새와 짐승,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화석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자취를 남긴다. 시베리아의 얼음 속에서 맘모스의 화석이 나오고 호막 속에서 공룡의 피를 빨아먹던 모기의 화석이 나오는 것처럼 어디엔가 인간의 화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화석을 발굴해 낸다는 것, 그것은 오랫동안 여러 고곡학자들의 숙원이 이었다. 그러나 어디서고 인간의 화석이란 좀체로 발견되지 않았다. 적어도 1961년까지는 그랬다. 



화석 


1961년 7월 이스라엘의 아무르 동굴에서 20만년에서 10만년 전쯤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네안데르탈 인의 화석이 도쿄대학의 고조사단에 의해 의해 발굴되었다. 이때까지 고대 인류의 완전한 뼈 화석이 발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고학자들은 흥분했고 이로써 선사시대 인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네안데르탈 인의 화석은 고대 인류의 생물학 .해부학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려주었지만 인간의 문화-이르테면 무엇을 먹었으며, 대개의 건강상태는 어땠고, 어느 정도의 문명 생활을 하였는가를 연구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오히려 인류의 조상이 배설한 지저분한 분(糞)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화석으로 변한 이른바 분석이라는 것이 고대 인류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분석의 발견 


분석이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분(糞)의 화석을 말한다. 학자들이 분석에 주목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이것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새로운 것에 속한다.

분석 연구의 시초는 1875년 미국의 와이면이 프로리다 주의 세인트 존스강의 담수계 패총에서 많은 어골이 포함된 분석을 발견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와이먼은 이화석을 깨뜨려 많은 어골을 찾아냈고 그것에 대해 기록했다. 그 후 1896년에 하쉬벨거가 선사시대의 민족적 식물사에 원점을 탐구하면서 분석을 다루었고, 1910년에 영이라는 사람은 켄터키 주의 어느 동굴에서 식물의 종자가 포함된 분석을 발견하였다. 영은 분석 속에 포함된 종자들을 채취하여 감정하였지만 이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선사시대에 살았던 어떤 동물의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물의 화석보다 사람의 화석이 훨씬 늦게 발견된 것처럼 분석 역시 사람의 것은 그 모습을 좀처럼 나타내지 않았다. 1961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인류학자 브레이도우트 박사, 하버드 대학의 동물학자 리이트 박사 등이 이란의 더크로스 산맥 지대의 아시어브라고 하는 1만년 전의 흙무더기 속에서 분화석(糞化石)-코프롤라이트를 발견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간의 분석임이 확실해 보였고 이 화석의 성분을 분석함으로서 그들은 그 무렵의 인간들이 무엇을 먹고 지냈는지 알게 되었다. 



⊙ 가장 오래된 화장실 


기원전 3800년에 지어진 지중해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 궁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밑에 수로가 있어 물로 세척이 가능했다고 한다. 



⊙ 유럽의 화장실 역사 


300년 전쯤 프랑스의 토로와라는 곳의 시민들은 옛부터 집 안에 화장실을 만들지 않고, "보아 거리"라고 하는 길거리를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관청에서는 시민들에게 각자의 집에 화장실을 만들도록 종용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볼일을 보는 것을 금지시켜 버렸다. 그러자 시민들은 시청 건물 앞에서 항의를 했고, 대표를 뽑아 관청의 결정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관청에서 일하시는 여러분, 우리들의 선조들은 항상 거리에서 볼일을 보았소.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손들도 전통대로 계속 이 거리에서 볼일을 보게 될 것이오"

관청에서도 시민들의 이러한 아우성에 어쩔 수 없이 노상 화장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승리감에 도취한 주민들은 "보아 거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고, 기쁨의 표시로 배변을 해서 오물이 산처럼 쌓이도록 해 놓았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도시에서는 분뇨와 쓰레기를 모두 도로에 내다 버리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으므로, 거리가 오물로 진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든지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명이 "뒷간 거리" 혹은 "변소 거리" 이다.

이런 실정이므로 비라도 내리면 어느 마을의 도로이건 간에 쓰레기와 진흙과 분뇨가 범벅이 되어 진창을 만들기 일쑤였다. 말의 무릎까지 빠질 정도의 진창이었고, 그 진창에 빠져 죽는 가축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람이 빠져 죽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인사불성이 된 취객이 발을 헛디뎌 진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기진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였다. 파리의 포장된 큰 거리에서 도로의 중앙에는 아주 넓은 분뇨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길을 횡단하려면 이 분뇨 개천 위를 가로지른 널빤지 다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성의 경우라면 문제가 심각했다. 하이힐을 신은 데다가 당시의 여성들의 머리 장식은 높이가 탑만큼이나 높았고, 치마 또한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귀족 부인들은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힘센 젊은이를 돈으로 사서 업힌 다음 건너는 일도 많았다. 이것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인들이 있었다고 하니. 직업치고는 희비가 엇갈리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풍만한 여성들을 매번 업을 수 있었으니 좋았겠지만, 오물 개천에 발을 담그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1797년 프랑스의 한 시민이 불평을 했다.

"파리의 불결함은 너무 지독해서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번들번들하고 미끄러운 진창으로 덮힌 울퉁불퉁한 보도를 걷는데, 빨리 걸으려고 하면 미끄러지고 설령 일어나려 해도 체중을 이기지 못해 구르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보도까지도 오물로 미끄러울 지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지경이 된 것일까? 1843년의 「파리시 공보」를 보면 그 이유를 쉽사리 알 수가 있다.「벌건 대낮에도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그다지 희귀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전혀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유럽 각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화장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거리에서 볼일 보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 한국의 화장실 역사


통일신라시대 경주 도시(王京) 유적에서도 화장실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됐다. 길이 4m, 폭 1m, 깊이 80㎝ 정도 규모로 20∼30㎝ 크기의 돌을 사용해 5단 정도 높이의 석곽을 세운 형태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건물지 뒤편에서 나온 것으로 미뤄 화장실이나 정화조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지만 토양분석을 하지 못해 역시 단정은 내리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는 그나마 양호하다. 문헌이나 유적, 유물로도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은 소변을 요강에 보았고, 대변은 매우틀이라는 휴대용 변기를 이용했다.

매우틀은 임금의 편전과 왕대비의 침전에만 있던 이동식 화장실이다.

매우(梅雨)의 매는 "큰 것"을 우는 "작은 것"을 이르는 향기로운 말이다. 매우틀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 사기나 놋그릇을 넣어 서랍처럼 넣고 뺄 수 있도록 했다.

1895년 을미개혁 이후, 단발 령이 시행될 때 궁인들이 밤에 화장실에 갔다가 머리카락을 잘리고 오는 일이 생기자 화장 실을 "도깨비소굴"이라 부르기도 했다. 


⊙ 우리나라 화장실의 다양한 명칭 









  측간

옆에 있는 공간 정방, 몸 속을 깨끗이 해주는 공간

북수간 뒷물을 하는 공간

변소 대소변을 보는 공간

해우소 생리적 걱정 뿐만 아니라 마음의 근심까지 소멸시키는 공간

뒷간 건물 뒤쪽에 있는 공간

(뒷간의 유래 - 민속학자 김광언은 "민속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찬바 람을 등에 지고 북쪽에서 내려온 우리 민족은 언제나 앞이 남쪽이고 뒤가 북쪽이 었다. 똥오줌 누는 공간을 "뒷간"이라 이르게 된 것은1459년 "월인석보"에서 처음 나타난다.")

⊙ 화장실 명칭의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변소를 먼 옛날부터 "뒷간"이라고 불렀다. "뒤를 본다"라는 말을 "똥을 눈다"라는 순 우리말이다. 초대 국회 때 어느 의원이 손을 들어 발언을 신청한 뒤 " 뒤 좀 보고 오겠다"는 발언을 해서 항간(巷間)에 오래도록 웃음거리가 된 적까지 있을 정도이다. 뒷간이라는 말 이외에는 "칙간(厠]間)", "정낭", "통숫간" 이란 말들도 역시 널리 통용되었다. 사전(辭典)에서는 "칙간"은 강원도와 전라도 지방의 사투리이고, "정낭"은 함경도 지방의 사투리이며, "통숫간"은 그냥 방언(方言)이라고만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적 풀이들 역시 부정확한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데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변소를 두고 뒷간, 칙간, 통수간 등의 용어가 고루 다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똥구당 혹은 똥구덩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또 통시 혹은 통싯간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통숫간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고루 쓰였던 말만 대충 꼽아도 뒷간, 칙간(厠間), 정낭, 통싯간, 똥 통싯간, 똥구당, 변소 등 여러 가지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변소를 가르키는 한자의 [厠]은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한자에서 원래 변소는 [ ]이고 [厠]은 [ ]의 속자(俗字)로 우리나라에서는 "측"이라고 잘못 읽히고 있다. 변소의 뜻으로 "치", 기운다는 뜻으로 "칙"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씨는 지적한 바 있다. 



⊙ 한국의 칙간의 유형 


<한국 민족 문화 백과사전>에 기록된 한국 측간의 유형을 보면 측간이란 대소변을 배설하는 장소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집이나 시설, 뒷간, 헛간, 복수간, 통시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 중에는 혼자 사용하는 것과 여럿이 동시에 사용하는 것, 남녀가 따로 사용하는 것 또는 다른 시설과 하께 있는 것 등 그 용도에 따라 내칙(內 ), 외칙(外厠), 중칙(重厠), 북수(北水), 목방(沐房), 세답방(洗踏房) 등으로 달리 이름지어 부른다고 되어 있다. 



⊙ 분양법의 전래와 분뇨의 이용 


역사적으로 볼 때 인분을 저류하게 된 것은 분양법을 도입하면서부터이다. 인분을 퇴비로 하여 지력의 쇠퇴를 방지하고 농작물의 수확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분양법이 사용되었다. 결국 분양법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변소가 언제부터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는가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이미 중국의 은나라 때부터 사실상 전답에 분을 뿌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서단전"이라는 갑골문의 해독을 통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따라서 분양법이 시작된 시기를 이때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당시의 유적으로 바퀴가 하나로 된 일륜차가 종종 발견되는데 그 중에는 분뇨를 운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이는 분뇨를 논· 밭으로 운반하여 작물에 비료로 사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인분을 떡처럼 만들어 이를 건조시켜 두었다가 논· 밭의 흙에 섞기도 했는데 이를 분병이라고 불렀다.



고대 중국의 이러한 농경법은 한반도에도 전해졌다. 은의 봉왕 신의 숙부인 기자가 정전법을 간언 했다가 받아 들여 지지 않게 되자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기자조선을 건립했다는 설이 있다. 기자조선이 실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사학자들 간에 여러 의견이 분분하니 그 자체에 관한 것은 논외로 치더라고 이때 은의 분양법이 한번도에 전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이 때 정전법은 9년만에 정법이 아니라 4년만에 농사를 짓는 전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양법과 정전법은 그 후 삼한 시대를 거쳐 신라에도 전해졌다. 지금도 경주에는 이 정전의 유지가 남아 있다. 



⊙ 한국의 요강문화 


분뇨를 퇴비로 이용하던 농경우리나라는 이미 신라시대 때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고, 문화권에서는 되도록 후미지고 먼 곳에 칙간을 두어 분뇨를 배설하고 저류했다. 생리적으로 자주 배설해야만 하는 소변까지 칙간을 이용할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편리하게 이용해온 간이식 변기가 바로 요강이라는 그릇이었는데, 중국에는 요강과 비슷한 수병이라는 소변기가 있었다.

농경 문화와는 깊은 관계가 없었지만 생활의 필요에 따라 유럽에서도 일찍이 "볼타르"나 "오마르"같은 변기가 있어서 널리 이용되었다. 요강은 마치 작은 항아리처럼 생긴 것으로 그 위에 뚜껑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그 크기와 용량이 다양하고 모양은 밑이 둥글게 넓고 배가 볼록하여 넘어질 염려가 없었다. 재료의 종류도 유기, 청동, 청자, 백자 외에도 도기, 자기, 오동나무에 옻칠한 것 등 매우 다양하다. 



⊙ 궁중의 칙간과 변기 


우리 나라의 궁중에서 사용해온 뒷간에 대한 문헌은 아직 이렇다 하게 발견된 것이 없다. 현존하는 고궁의 설계도를 보아도 칙간은 없고 다만, 창덕궁 대조전에서 회랑으로 연결된 경운각 뒷편에서 유일하게 칙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경운각의 모난 뒷칸은 당시의 욕실이고 그 옆의 작은 칸이 뒷간으로 쓰였다고 추측되는데 마루에는 배설구로 보이는 긴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다. 마루에서 땅바닥은 약 70센티미터 높이의 공간이고 밖에 있는 문 두짝을 열고 보면 그 속에 7센티미터 가량의 네 바퀴(30×70센티미터)가 달린 끌개 한 대가 있다. 끌개 위에는 3센티미터 높이의 칠테가 둥글게 박혀 있는데 그 위에 배설물을 담는 그릇을 얹어 두었다가 밖으로 끌어내는 데 쓰여진 유물같이 생각된다.



⊙ 착신 


우리 나라 사람들은 민속신앙의 하나로 변소 귀신( 神)이 있다고 믿어 왔다. 이에 대해 민속학자 임동권 씨는 "한국에서는 칙신( 神)을 칙귀( 鬼)라고 불렀는데 이 귀신은 성질이 고약한 여신(女神)으로서 매월 6일, 16일, 26일과 같이 6자가 들어가 있는 날에는 변소에 있지만 그 외의 날엔 밖에 나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6자가 들어있는 날엔 변소에 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하는 풍습이 있었다" 고 말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뒷간을 항상 안채나 사랑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었다 특히 상류 가정의 안뒷간은 부엌 옆 마당의 디딜방앗간 벽에 붙여 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지어 사랑채 뒷간은 대문 밖에 두기까지 했다. 따라서 밤늦게 드나들 때에는 공포를 자아내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공포심이 뒷간 귀신의 존재를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확신하게 말들었다.

뒷간 귀신의 신앙은 변소각시(전남, 경북), 칙간 조신(전남), 정낭각시(전남, 경북), 변소장군(경북), 칙시부인(제주도), 칙도부인(제주도) 등으로 전국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지만 귀신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대개가 여자 귀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원도에서는 뒷간을 지은 뒤에 반드시 길일(吉日)을 받아 제물과 부적을 갖추고 탈이 없도록 해달라고 고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때문에 시월 상당 고사 때는 반드시 뒷간에 떡을 바쳤다. 또 아이들이 똥구덩이에 신을 빠뜨리거나 사람이 빠졌을 때에도 떡을 해 놓고 액땜을 빌었다. 이 뒷간 귀신은 긴 머리칼을 발에 걸고 헤아리는 버릇이 있어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씌우는데 귀신을 만난 사람들은 이때부터 앓다가 결국 죽게 된다고 믿었다. 칙간에 갈 때 세 걸음 내지 다섯 걸음 정도 앞에서 두서너 번 기침 소리를 내면 귀신이 피한다는 기록도 있고, 제주도의 칙시부인은 원래 문신(門神)이었던 남(南)선비의 첩이었으나 본처를 죽였다가 그 아들에게 복수를 당해 뒷간 귀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집안의 귀신들은 대개 무병장수와 복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착한 귀신인데 뒷간신망은 성품이 별나서 잘 받들지 않으면 화를 입히는 못된 귀신이라고 믿었다.

옛날 시골에서는 흔히 어린이에게 "똥떡 구워 준다"든가 "다리 밑에 똥떡 어미 애를 주워 왔다" 든가 하면서 놀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한술 더 떠서 그 "똥떡 어미가 너를 데리러 온다" 는 말로 거듭 놀려서 정말인 중 알고 겁에 질려 우는 아이를 보고 웃는 민간 풍습이 있었다. 



⊙ 조선시대 농촌의 뒷간 


조선시대 농가 화장실은 대부분 본체와는 떨어진 사랑채옆이나 대문에 가까운 마당의 한 쪽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내부는 큰항아리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두 개의 나무판을 걸쳐 가운데에 변을 볼 수 있도록 공간을 띄워 놓은 것이었다.

때로는 앞에 소변의 흩어짐을 막는 나무판을 대어 놓은 것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변소의 문이 있는 쪽을 향해 앉는데 반해 일본 사람들은 그 반대 방향으로 앉는 관습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안쪽 벽면을 향해 앉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출입문 쪽을 향해 앉게 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재미있는 해석이 있다. 첫째는 방위 본능에서 출입문 쪽에 어떤 침입자가 나타날 때 쉽게 대항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막힌 벽을 향해 앉기보다는 열린 곳을 향해 앉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다. 셋째는 노크하기 쉽게 하기 위해 서라고도 하고, 넷째는 냄새를 줄이기 위해 서라고도 한다.

사실 당시의 변소는 들어서기가 두려울 정도로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따라서 변소의 벽도 얕게 담을 치거나 앞문도 없이 거적을 걸어 놓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문쪽을 향해 앉으면 바깥 공기를 가까이 호흡하여 분뇨의 냄새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농가에 따라서는 항아리 위에 통나무 여러 개를 새끼로 묶어 걸치고 가운데만 대소변이 떨어질 수 있도록 비워 놓은 형태도 많았다. 용변 후에는 짚이나 나뭇잎, 채소, 옥수수 수염 등으로 뒤를 닦고 이들도 함께 변기 속에 버려서 분뇨와 함께 퇴비로 사용했다.

일본에서 발견된 백제 유적에서는 뒤를 닦는 주걱이 많이 나왔는데 길이 20∼25센티미터 너비는 1∼2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이때에는 쪽박을 긴 나무 막대에 묶어 분뇨를 퍼내고 그것을 "똥장기"에 담아 운반했다.

이 분뇨 운반용 장기를 일명 "똥물장기"라고도 했는데 나무의 여러 쪽을 둥글게 짝을 맞추어 대나무 쪽으로 테를 치고, 분뇨를 퍼내는 입구를 좁게 만들어서 운반시에 내용물이 잘 쏟아지지 않게 해다. 똥물장기는 지게로 지고 운반하거나 먼 거리는 소의 등이나 우마차에 싣고 운반하기도 했다. 어떤 농가에서는 처마밑에 소변과 대변통을 따로 설치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쇠죽통을 소변통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농촌의 뒷간은 전국에 걸쳐 지붕이 없는 것이 상당수였다. 장마철 빗물에 넘쳐 분뇨가 흘러 나와도 예사롭게 생각했는데 농사에 소용되는 귀중한 비료인 분뇨량이 불어라는 것을 그런대로 묵과했다는 점과 뒷간의 자연 청소라는 의식이 겹쳐져서 그랬던 것 같다. 영남 일대 농촌에서도 지붕 없는 뒷간이 일반적이였으며 소슬대문 부자집에도 뒷간은 지붕 없이 그냥 흙담에 에워싸여 있었다. 



⊙ 근세 서울의 분뇨 처리 


말은 제주도에서, 사람은 서울에서 커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침체의 역사에서 개화기를 맞고 개화기에서 근대화가 이룩되던 시기에 서울에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분뇨의 처리 문제였다. 6.25 사변이 날 때 100만이었던 서울의 인구는 수복 후부터 시작된 50년대의 무질서한 팽창을 계속했다. 해방촌을 비롯한 서울의 산과 숲은 판자촌으로 바뀌었고 청계천이 탁계천이 되어 공해의 시궁창으로 변해버렸다.

8.15 해방에서 60년대 초까지만 해도서울의 변소는 담밑 또는 울타리 밖에서 분뇨를 퍼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길쪽에서 분뇨를 퍼내는 집들이 많았다. 물론 평소에는 그 구멍을 나무 판자로 막아 밖에서 분뇨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서울 근교의 농민들은 시내에 들어와서 돈을 주고 변을 퍼가기도 했다. 농부들은 변을 퍼가게 해준 대가로 취사용 땔감이나 채소, 과일, 김장거리들을 사례하였다.

지난 날 한식 가옥 설계에 있어서 변소는 가장 무시되고 천대받는 부분이었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것은 장독대였을 뿐 변소는 담 모퉁이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있는 것이 고작이었고 변두리 영세 가옥을 지을 때는 설계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 화장실에티켓


⊙ 에티켓 1 


화장실 주 출입문 입구에 줄을 서서 빈 화장실마다 순서대로 들어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무리 용무가 급해도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서는 안 된다. 

노크를 한 다음 응답이 있으면 조용히 기다린다. 자꾸만 두드리거나 「빨리 나오지 뭐해」등의 비난을 하지 말 것. 

용변을 본 후 휴지는 정해진 곳에 버리고 바닥에 껌이나 침을 뱉지 말자.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할 때는 용변을 본 후 반드시 물을 흘려보내 깨끗하게 한다. 

다른 사람이 기다리는데 안에서 책을 읽거나 쓸데없이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다. 




⊙ 에티켓 2. 


처음처럼 


화장실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용무를 보고 난 후 물을 내려 내가 사용하기 전과 사용한 후의 화장실을 처음처럼 그대로 유지시킨다. 


사용한 화장지는 변기에 버리자. 


화장실이 불결하고 냄새가 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용변을 처리한 화장지를 휴지통에 버리는 데서 비롯된다. 화장실마다 화장실용 휴지를 반드시 준비하여 변기에 넣어 물로 쓸어 내려 냄새를 없앤다. 


껌, 침 안 뱉기 


화장실 청소에서 가장 힘든 부분 중의 하나가 껌을 떼어 내거나 침과 오물을 닦아내는 일이다.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가장 불쾌한 것이 이렇게 더럽혀진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깨끗하게 사용하려면 나부터 껌이나 침을 함부로 뱉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화장실에서는 금연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중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 또한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일일 것이다. 공중화장실은 당연히 담배를 피워도 되는 장소라고 오해하거나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쾌적한 공간을 위해 공중화장실 내에서 금연하여야 한다. 


소변기에 가까이 다가가기 


남자들의 경우 소변기에 한 발짝 떨어진 상태에서 용무를 보는 경우 소변이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불결함과 악취의 원인이 된다. 한 번 더럽혀 지게 되면 다음 사용자도 소변기에 가까이 가게 되지 않으므로 반복적으로 소변이 화장실 바닥을 더럽히게 되고 냄새가 배이게 된다. 남성들은 반드시 소변기 가까이 밀착하여 용무를 보고, 절대 소변이 바닥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화장실 한 줄 서기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화장실을 사용하게 될 경우 화장실은 매우 혼잡하고, 서로 부대끼며, 바로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용무를 보기가 편하지 않게 되며, 앞 사람 사용시간이 길어지면 옆줄에 서있는 사람보다 먼저 왔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 야 하는 불이익을 당하게 돤다. 화장실 한 줄 서기는 용변 칸 앞에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화장실 밖에서 일렬로 서서 기다리다가 한 사람이 나올 때마다 들어가는 방식이다. 화장실 문 입구 쪽부터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서로 공평하고, 보다 즐거운 기분으로 화장실을 사용하는 줄 서기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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